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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인시(龍仁市)는 본래 용구현(龍駒縣)과 처인현(處仁縣)을 합치고 용구(龍駒)에서 용(龍)자와 처인(處仁)의 인(仁) 자가 합쳐 용인현(龍仁縣)이라고 칭하다가 후에 양지군(陽智郡)을 합쳐 오늘의 용인시(龍仁市)가 되었다.

용인지방(龍仁地方)은 부족국가시대 이래 광주지방(廣州地方)과 깊은 관계를 맺어 왔다.
일찍이 온조왕이 하남 위례성에서 즉위한 이후 계속 백제의 영토에 속하였다. 용인지방이 용구현(龍駒縣)이란 명칭으로 기록상에 나타난 것은 서기 475년(고구려 장수왕 63년)이며 이것이 최초이다. 이해에 고구려 제 20대 장수왕은 3만의 대군을 이끌고 남정하여 백제의 왕도인 한성을 점령하고 아단산성에서 백제 제 21대 개로왕을 죽였다.

이때 고구려는 새로운 점령지인 용인지방을 중앙집권전 군현 제도에 따라 구성현(駒城縣)으로 명명하고 자국의 영토로 귀속시킴으로 비롯되었다.
용구현(龍駒縣)을 일명 멸오현(滅烏縣)이라 했던 별칭이 기록상에 나타나는데, 이것은 백제때의 용인지명으로 우리말의 "말아"를 한자음으로 표기한 것이며 고구려가 편입한 새로운 영토를 구성(駒城)으로 한 것도 "말아"를 한자음으로 표기한 것으로 "말아" 또는 "말" 은 마루와의 동의어로서 크다와 높다는 의미가 포함된다고 풀이할 때 구성(駒城)은 큰성(大)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삼국이 통일되어 신라의 통치를 받게된 용인은 서기 757년(신라 경덕왕 16년)에 1주(州), 1소경(小京), 28군(郡), 46현(縣)을 한주(漢州)(現:廣州)의 영현으로 할때 용인(龍仁)을 이에 속하게 하였고 구성(駒城)을 거서(巨黍)로 고쳤다. 이때에도 크다는 뜻의 "말아"를 "거(巨)"로 표기하였다.

그후 신라(新羅)가 망하고 고려 태조(高麗 太祖)가 즉위하자, 서기 940년 (고려 태조23년 3월) 광주를 한 전국의 주(州), 부(府), 군(郡), 현(縣)의 명칭을 고칠때 용구현(龍駒縣)이라 하였다.
고려(高麗) 제 8대 현종(顯宗) 9년 서기 1018년에 전국을 8목(牧) 56지주군사(知州郡事), 28진장(鎭將), 20현령(縣令)으로 개편할때 용인(龍仁)을 광주목(廣州牧) 임내(任內)에 두었다.

이로부터 154년이 경과한 서기 1172년에 와서야 광주(廣州)에서 분리하여 감무를 두고 현감으로 보직하였다.
처인현(處仁縣)은 본래 수원부(水原府)에 속해있던 부곡(部曲)이었는데 처인(處仁)이라는 명칭은 이미 고려 현종(高麗 顯宗)때에도 그렇게 불리워졌다.

한편 양지현(陽智縣)은 본래 수주(水州)(現:水原)이었다가 조선 정종2년(서기 1399년)에 양지현(陽智縣)으로 승격되었으며 태종 14년인( 서기 1414년) 광주부(廣州府) 관할구역(管轄區域)인 추계향(秋溪鄕)으로 치소(治所)를 옮겼다. 그 후 세종 때까지 광주진(廣州鎭)의 관할구역(管轄區域)으로 계속되었는데 방면이 6방(坊)에 불가하였으므로 당시 현감 양원이 상계하여 성종 경인년인 서기 1470년 죽주(竹州)의 고안(高安), 대곡(大谷), 목악(木岳), 제촌(蹄村) 등 4부곡을 영현으로하고 충청도에서 경기도로 내속(來屬)되었다.

고종32년인 서기 1895년 4월 전국 아문(衙門)의 칭호를 부(府)로 고치는 지방관제(地防管制)의 개혁에 따라 용인현(龍仁縣)이 용인군(龍仁郡)으로 개칭되었고, 다음해인 1896년 경기도의 4등군(等郡)이 되었다.
또한 양지현은 갑오개혁(甲午改革)이후 지방관제(地方管制)의 개편에 따라 건양원년(建陽元年)인 1896년 양지군(陽智郡)으로 되었다가, 1914년 용인군(龍仁郡)으로 통합되어 현재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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