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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렬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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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렬서원 외삼문
충렬서원 외삼문
충렬서원 명륜당
충렬서원 명륜당
정몽주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세운 서원 충렬서원 충렬서원은 고려 후기 충신이자 ‘동방성리학의 시조’로 불린 포은 정 몽주(1337∼1392) 선생의 학덕과 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지은 서원입니 다. 조선 선조 9년(1576)에 지방 유림들이 뜻을 모아 정몽주와 조광조를 기리기 위해 처음 지었는데, 당시 이름은 ‘죽전서원’이었습니다. 죽전서원은 임진왜란(1592)때 불에 타서 사라졌고, 선조 38년(1605) 에 정몽주의 묘소 아래에 서원을 다시 지었습니다. 그때 조광조의 위패 는 심곡서원으로 옮겼고, 광해군 원년(1608) ‘충렬’이라는 이름을 짓고 현판을 하사하여(사액), 나라의 공인과 경제적 지원을 받았습니다. 그 뒤 로 충렬서원은 선현에 대한 배향과 지방민의 유학교육을 담당하였습니 다. 고종 8년(1871)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폐쇄되었으나, 1911년 에 새로 사우를 세우고 강당(1956)을 복원하였으며, 1972년에는 서원 전체를 보완 신축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습니다.

충렬서원은 공부하는 강당을 앞쪽에 배치하고 사당을 뒤쪽에 배치한 ‘전학후묘’의 양식을 따르고 있습니다. 입구의 홍살문과 내삼문·외삼문· 사당이 거의 일직선으로 배치되어 있지만, 강당이 축에서 벗어나 사당 과 나란히 보이는 점이 특이한 점입니다. 또한 재실이나 장경각, 고직사 등 부속건물이 없고 사당과 강당만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18세기 이후 에는 서원의 교육 기능이 사라지고 제사 기능 중심의 시설로 바뀌면서 생긴 특징으로 볼 수 있습니다.

충렬서원중건기(1608)에 따르면 사우(사당)가 3칸이고 동재와 서재 가 각각 2칸이며, 문루는 3칸인데 윗채가 강당이고 아래채가 문이 된다 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를 보면 현재와 달리 앞에는 문루와 강당을 갖 추었는데, 문루의 위를 강당으로 활용하였고 그 뒤에 재사 건축을 두었 다고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현재 충렬서원과 달리 건축물을 모두 갖춘 모습이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충렬서원의 사당에는 정몽주를 중심으로 좌우에 정보(鄭保, 정몽주의 손자)와 이시직(李時稷, 선조~인조 때의 문신)의 위패를 모셨고, 1997년 유림이 뜻을 함께 하여 추담 오달제(吳疸濟, 인조 때의 문신)의 위패를 모 셨습니다. 오달제는 병자호란 직후 청나라에 끌려가 참형을 당한 삼학 사(홍익한·윤집·오달제) 중 한 사람입니다.

충렬서원이 보관하고 있는 유물로는 정몽주의 『단심가』와 홍원주 (정조 때 여류시인)의 『유한집』이 있습니다. 이 곳은 강당과 사당만으 로 이루어진 소규모 서원의 형식을 잘 보여주고 있으며, 해마다 음력 3 월과 9월에 향사를 지내고 있습니다.